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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4. 11] <한반도는 일제의 군사요새였다> 저자 이완희 PD초청 탐사보고(강의녹취록 포함)

평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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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http://cafe.daum.net/bsspark/k2ar/16
  •  4월 11일 오후 3시, 책과아이들 5층 갤러리 평심에서 40여 명의 회원과 시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이완희 KBS PD 초청 '탐사보고' 행사가 열렸습니다.

    강의에 나선 이완희 PD는 많은 사진자료들을 보여주었습니다. 부산, 진해, 거제도 뿐 아니라 충북 영동과 군산, 목포 등 전국 각지에 설치해놓은 일제의 군사요새들을 러일전쟁부터 1910년까지, 그리고 1920년과 30년대, 또 1941년부터 패망까지의 시기별로 구분하여 설명하였습니다.

    해운대와 이기대, 태종대 등 부산 지역에 설치한 일제의 군사요새 설명을 들은 참가자들은 부산에 이런 요새들이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와하며 한 번 가봐야겠다고 탄식하기도 했습니다.

    이완희 PD는 아직도 많은 군사요새들이 남아있으며, 이를 발굴하고 발굴된 요새들에 대한 고증과 보존, 역사적 유물로서 후대에 알리는 활동은 정부에게 맡길 수 없고, 결국은 시민들의 손으로 해나가야 할 것이라고 언급하고, 이런 활동이 없는 한 광복 70년의 의미는 퇴색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이완희 PD는 초읍에 있는 시민도서관에 총독부가 남겨놓은 그들의 강점 기록들이 상당한 양으로 남아있지만 그것을 찾아보고 연구하는 사람들은 다름아닌 일본인이라고 하면서 한국사람들은 이런 역사찾기에 너무도 무관심하다고 자성하기도 하였습니다.

    준비한 저서가 다 동이 날 정도로 참가자들의 이 문제에 대한 관심은 뜨거웠습니다. 이완희 PD에게 저자사인을 받으며 환영과 감사의 뜻을 전했습니다.

    25일 시작되는 올해 평화발자국이야말로 우리의 역사를 제대로 알고 제대로 되찾기 위한 작은 노력입니다. 일본 집단자위권 행사와 MD 구축을 매개로 한 한미일 군사동맹의 실현은 일제가 한반도를 요새화한 치욕적인 과거 역사를 확대재생산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이 날 참가하셨던 모든 분들께 감사드리고 소중한 자료와 열정으로 참가자들에게 깊은 가르침을 전한 이완희 PD께 정말 수고하셨다는 말씀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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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의 녹취록>

    25년간 KBS PD로 다큐를 만들면서 우연한 기회에 이런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사람들이 이런 문제에 관심을 갖는 계기를 마련하고 싶어서 책을 쓰게 되었다. 이 책에 대해 사람들이 별로 반응이 없었는데 이렇게 많은 분이 나와주셔서 큰 힘을 얻는다.

    시간이 짧아 다 설명하기는 어렵고 일제시대 군사지배사를 전체적인 안목에서 이해하기 위한 몇 가지 중요한 내용을 중심으로 소개하겠다.

    (1945년 일본 패망 뒤 무장해제되어 일본군들의 탱크, 대포, 분진포, 야포, 비행기, 소총들을 제주도 앞바다에서 수몰시킨 사진들을 보여줌.)

    1944년까지만해도 제주도에 일본군은 몇 백명 수준이었다. 일본 대본영은 45년 4월~6월 사이에 필리핀 해전에서 참패를 하고 오키나와에서도 패전을 면치 못하자 미군이 일본 본토에 상륙해서 공격해들어올 것이라고 판단했다. 일본은 미군이 규슈 남단으로 오거나 대만을 거쳐 제주도로 상륙할 것이라고 보았는데 한반도 남부가 미군의 상륙지점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에 중국과 만주에 있는 일본군들을 제주도와 남부에 집결시킨다. 1945년 패망 직전에 미군이 확인한 일본군은 제주도에 5만 8천명, 38도선 이남에 17만 5천명 정도였다고 한다. 일본은 1945년 10월 경 미군이 진주한다고 판단하고 군사진지를 구축했다. 그러나 히로시마 나가사끼에 원폭투하로 전쟁이 갑자기 빨리 중단되었는데 그렇지 않았다면 오키나와에서 있었던 전쟁이 한반도에서도 일어났을 것이다.

    그럼 어떤 전쟁이었나? 일본 규슈 남단, 타이완 오른쪽에 작은 류큐 왕국이 있었는데 일본의 지배로 1871년에 일본의 식민지가 된 나라다. 여기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미군이 54만명을 동원하여 집중 포격한 결과 일본군 11만명, 민간인 8만명이 사망했다. 일본군은 오키나와 지하에 땅굴을 파고 전쟁준비를 했으나 패전했다. 나하라는 현 소재지에 세워진 전쟁평화공원에 2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의 이름이 새겨져있다. 끔찍한 것은 전쟁에 의한 사망보다 일본의 전쟁관에 의한 희생이다. 질 것이 분명한 데도 군인들을 굴속에 모이게 했다가 항복하지 못하게 하고 수류탄을 던져서 자살을 하게 했다. 미군에게 항복하면 가족들까지 그냥두지 않을 것이라고 민간인들을 협박하여 그들까지 땅굴에서 집단자살하게 만들었다. 심지어 바위에서 투신자살한 사람도 많다. 일본이 원폭의 아픔을 언급하지만 그것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은 이와 같은 오키나와의 비극이 제주도나 한반도 남부에서도 충분히 벌어질 수 있었다는 우려 때문이다.

    그럼 한반도에서는 소위 태평양전쟁의 전투가 있었을까? 별로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전투가 실제 많이 벌어졌다. 

    1944년 하반기부터 미군은 비행기와 각종 잠수함을 동원해서 동지나해 일본의 군, 민간 수송선에 무차별 공격을 가해 수 십척이 침몰되고 일본인 뿐 아니라 조선인들도 죽었다. 예를 들면 1945년 4월 14일 제주도 한림항과 비양도 사이에 일본의 탄약수송선 주산마루, 호위함 노미함, 31해방함 등이 피신해있었는데 미국의 타이란트가 일본군의 무선교신을 탐지하여 한림항으로 침투, 모든 일본군 배를 격침시킨 일이 있다. 한림항 주변 주민들은 일본군들 시체가 떠내려왔다는 증언을 한다. 목포와 제주도를 왕래하는 수송선 고와마루호도 추자도에서 횡간도 사이에서 공습을 받아 침몰했는데, 사상자가 200~500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7월 30일 해남 송지면 앞바다에서 제주도에서 민간인을 싣고 온 수송선 호에이미루 호가 미군의 어뢰공격을 받아 침몰한 일이 있다. 이런 내용은 한국에선 거의 알려지지 않다가 일본인이 조사하여 책을 내어 알려지게 되었다.

    남해에 있는 망운산 중턱에 미 공군 전공기념비가 있는데 45년 8월 6일 당시 오키나와에서 제주도 및 한반도 남쪽에 순찰을 위해 출격한 B-24 전투기가 추락해서 미군 승무원들이 전원 사망한 사건도 있다. 당시 일제가 이 사건을 대서특필한 기사가 있다. 이처럼 미군의 공습과 기뢰투하가 해방 직전에 많이 이루어졌다. 미군이 뿌린 기뢰가 하도 많아 통행을 하지 못할 정도여서 소해정을 들여와 상당히 오래동안 기뢰 부설 작업을 했다. 

    (부산경남지역 일제 군사유적을 표로 정리해서 보여줌.) 물론 이보다 훨씬 더 많다. 전문가들은 38선 이남에 남아있는 일본군 진지가 8천 개 정도 된다고 한다. 가장 많은 것은 역시 제주도다. 오름, 큰 산 어디나 일본군이 파놓은 땅굴이 있을 정도다.

    일본의 군사유적을 이해하려면 시기별로 이해해야 한다. 한반도에서 일본군이 영구적인 요새를 구축하기 시작한 것은 1904년 러일전쟁부터이며 크게 세 번의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1시기는 러일전쟁부터 식민지가 되는 시기.

    1910년을 식민지 출발이라고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포츠머스 조약이 식민지 시작의 출발점이다. 포츠머스 조약이 있고나서 일본은 한반도에 대한 지배를 인정받았다. 가장 먼저 필요한 건 물리적 힘, 군사적 지배였기 때문에 1908년에 용산에 대규모 군사시설을 구축하고 진해에는 해군기지를 건설했다.

    다음 20~30년대는 진해와 부산을 아우르는 진해만 지역에 요새를 구축하는 시기다. 이 시기에 부산을 요새지대로 선포. 그 안에서는 군의 허락없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민간인들은 쫓겨났다. 그 때도 부산은 중요한 관문이었다. 그래서 민간 비행장을 먼저 세운 게 울산이다.

    3시기는 1941년 진주만 기습공격 이후에 패망 직전까지 태평양 전쟁 시기에 만들어진 군사시설이다. 1945년 2월부터 8월까지 땅굴을 집중적으로 만들었다.

    땅굴 이야기부터 한다. 충북 영동 땅굴을 소개한다. 공식적으로 확인된 땅굴만 89개. 노인들은 그보다 더 많았다고 증언한다. 일본인 전문가에게 부탁해서 땅굴이 많은 이유를 확인해보니 45년 2월부터 마을사람들을 보국대로 동원하여 밤낮없이 팠는데 해방 직전에 미군이 한반도에 상륙하면 제주도, 목포, 고창, 군산 앞바다로 상륙할 것이라고 예상해서 그곳에 땅굴과 토치카 들을 마련했다. 가장 많은 군사시설이 남아있는 곳을 찾으라면 전북 고창일 것이다. 미군의 상륙을 저지하는 1선의 진지동굴을 구축했지만 오키나와의 경험에 따라 제2 방어선을 대전으로 상정하고 이곳으로 병력을 이동시켰다. 그러나 대전이 개활지고 평야지대여서 버티기 어렵다고 보고 대전에서 밀릴 경우를 대비, 산악지역인 영동에 땅굴을 파고 모든 탄약과 기름을 땅굴 속에 집적시켰다. 그러다 전쟁이 중단된 것이다. 

    일본 전쟁기록을 보면 조선군사령부, 총독부 지휘부, 인천 조병창 시설 일부, 황해도 제철소 시설 일부까지 이곳과 상주에 집적시키려했다고 한다. 조선판 마쓰시로 대본영을 만들려고 한 것이다. 일본 대본영은 일본의 알프스라고 하는 나가노 지역에 남아있다. 일본의 전쟁지휘부, 대본영을 이곳에 만들기 위해 엄청난 규모의 땅굴을 팠는데 조선인들이 동원되었다.

    그럼 다시 1시기로 가보자.

    1894년에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시모노세키 조약에 따라 요동반도를 차지하게 되고 만주철도 부설권도 얻는 등 만주로 진출하기 위한 발판을 마련한다. 그러나 조약체결 직후 영국, 프랑스, 러시아 3국 간섭으로 요동반도, 대련, 뤼순 등 조차지를 러시아에 다시 빼앗기게 되자 러시아에 대한 적대감이 극에 달했고 이후 10년동안 러시아와 전쟁할 준비를 했다.

    1903년 10월 경 러시아와의 전쟁이 불가피해지자 일본은 제일 먼저 수심이 깊어 해군이 활동하기 좋은 전남 신안군 옥도에 가(仮;임시)근거지를 만들고 규슈까지 해저 케이블을 깔고 적함이 다니지 못하게 수뢰를 깔았다. 그리고 인접한 진해만에도 방비대(사령부)를 건설하고 거제도 송진포에 가근거지를 세웠다.

    그리고 육군은 해군을 보호하기 위해 거제도 외양포와 저도에 포대를 만들었다. 그 유적이 남아있는데 저도의 경우 민간인이나 취재진의 접근은 막지만 군인이나 가족들은 콘도 등을 자유롭게 이용한다.

    러일전쟁을 준비하면서 해군은 옥도와 진해만, 육군은 외양포와 저도에 요새를 구축했다. 왜 옥도와 진해만이었나? 1904년 2월에 일본이 제물포에서 러시아 전함을 공격하고 선전포고를 하여 전쟁이 시작되었다. 당시 러시아 함대는 뤼순항에 있었고 일본함대가 이곳을 공격하다가 8천명이 죽을 정도로 장기전이었다. 장기전 과정에서 옥도는 일본 해군이 휴식을 취하고 정비도 하는 전진기지로 사용되었다. 결국 1905년 1월 초에 러시아 뤼순 함대를 함락시킨다.

    이후 2월부터 5월까지 일본은 3천명을 동원하여 각종 장비와 병력을 진해만에 집결시킨다. 진해만은 수심이 깊은 내해로 천혜의 요새다. 러시아는 뤼순이 함락되자 유럽에 있던 발틱함대를 불러왔는데 일본연합함대는 진해만에 숨어있다가 이곳을 지나던 발틱함대를 쓰시마와 협공하여 궤멸시켰다.

    이처럼 옥도와 진해만은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할 수 있게 만들어주었다.

    러일전쟁 이후 일본은 용산에 육군사령부를, 진해에는 진수부(해군사령부)를 세우고 1912년에는 진해 여좌동에 요새 사령부를 만들었으며 일제에 반대하는 의병들을 진압하는 역할을 했다.

    다음은 2시기, 20년대와 30년대에는 거제도와 기장 사이에 요새 포대들을 건설했다. 오륙도, 이기대 자리에 장자등 포대를 시작으로 거제도 지심도 포대, 기장 포대 등이 만들어졌다. 진해 요새사령부는 1941년에 부산으로 이전했으며 이름도 부산 요새사령부로 바꾸고 이 시기에 만들어진 요새들을 관리하는 임무를 부여받는다.

    장자등 포대는 이후 한센인들의 거주지로도 사용되었으며 육군 문서보관소로 사용되었다. 지금은 비어있는데 탄약고, 탄약 실어나르는 레일, 포대 설계도, 수심을 재는 수척(水尺) 등이 남아있다. 지심도 포대는 포대 유적 중 가장 온전하게 남아있는 곳이다. 기장포대는 신앙촌 안에 있어 볼 수 없다.

    1924년에 태종대 일대를 요새로 지정하여 출입을 금했다. 포대 위치는 태종사라는 절 건너편, 용왕대 부근, 등대 주변 관측소로 추정된다. 세밀한 고증이 필요한데 시민단체가 나서면 좋겠다. 태종대 영도 포대는 50년도에 북한에 침투하는 특수부대 요원들을 훈련하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거제에도 미군 군함이나 잠수함이 진해만 쪽으로 이동할 때 이를 탐지하여 공격하는 방비위소 등 해군 시설 유적이 남아있다. 여수, 거문도에도 콘크리트로 구축한 어마어마한 요새들이 남아있으며 가미가재와 같은 수상 자살특공대를 운영하기 위한 곳이었다.

    해방 직전의 육군, 해군 비행장들이 20곳이었다. 군산의 경우 규모가 제일 큰 비행장으로 4만 평 규모다. 일본은 군산과 대구, 그리고 뒤에 경성과 대전에 다치아라이 훈련소를 만들어 비행사들을 육성했다. 부산에는 해운대에 육군 비행장을, 김해에는 해군 비행장을 만들었는데 해군 비행장에서 훈련받은 비행사들이 김해공항을 통해 가미가재 특공대로 갔다고 한다. 놀라운 일이다.

    서해안 지역에 굉장히 많은 유적들이 있는데 목포지역 해안에 16개의 요새를 비롯, 유달산 주변, 장좌도, 고하도에 수상특공기지를 비롯한 요새들이 여러 곳에 남아있고 고창군 내에는 진지동굴이 남아있다.

    올해 광복 70년이라고 하지만 정말 식민지 시대란 뭔가? 일본이 어떻게 지배하려고 했는가? 이것을 알아야 광복 70년의 의미가 있다고 본다. 이 일을 할 수 있는 힘은 시민들에게 있다. 일본 시민들 중에는 이와 같은 것을 조사하고 연구하고 반전운동을 하는 분들이 많다. 기꺼이 즐거운 마음으로 온 것도 이런 활동을 하는 시민들과 만나는 것이 기쁘기 때문이다. 나는 일본말 잘 못하는데 알아야겠다고 생각하고 공부하니 알게 되더라. 초읍에 있는 부산시립도서관 한 쪽에 총독부 문서를 엮은 2만 권 정도의 장서가 있다. 각 분야별로 실태를 조사한 책들이 있다. 그런데 그 곳 사서가 말하기를 일본 사람들은 자주 와서 기록도 하고 복사도 하는데 한국 사람들은 거의 찾지 않는다고 한다.

    공부하고 연구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시민들의 모임이 많아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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