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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8/16-20] 오키나와에서 만나는 4박 5일간의 평화. 대체 평화가 무어냐

평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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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에서 만나는 4박 5일간의 평화. 대체 평화가 무어냐?

8월 16일 새벽 6시 30분, 인천공항에서 ‘평택에서 오키나와까지 평화기행단’이 모였다.
곧 평화기행단은 미국에 대한 테러위협으로 인해 까다로워진 검색을 거친 후, 9시 20분에 오키나와로 출발하는 비행기에 올라탔다. 11시 30분 경에 오키나와 나하국제공항에 도착하였다.

△ 오키나와 행 비행기를 타기 전 평화기행단원들..
이어 평화기행단을 마중 나온 우후자토교회 기요코 상, 통역을 해주실 히로유키 상, 토오코 상을 만나서 버스에 올라탔다. 히로유키 상을 통해 ‘오키나와의 총인구는 약 130만 명이고, 160여개의 섬으로 이뤄졌으며, 사람이 살고 있는 유인도는 50여개에 이른다. 그리고 오키나와는 류큐 왕국으로 일본과는 다른 독립국가였으나, 19세기 말 전쟁과정을 거쳐 강제로 일본에 편입되었다.’는 오키나와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들었다.

△ 이번 기행에 큰 도움을 준 키요코씨가 운전하는 미니버스를 타고 우리는 우후자토교회로 향했다.

△ 통역을 도와준 유키씨가 버스안에서 오키나와 지도를 들고 상세한 안내를 해주고 있다.

△ 버스안에서 참가자들
오후 1시. 우후자토 교회에 도착하여 기요코 상이 준비한 맛있는 하이라이스로 점심식사를 하고, 교회 근처의 아름다운 바닷가에서 해수욕을 즐겼다.

△ 테에라 나츠해 목사님과 키요코씨가 있는 우후자토 교회에 도착하여 기념촬영.

△ 즐거운 오후 한 때. 빡빡한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잠시 짬을 이용해 오키나와 해변에서 해수욕을 즐겼다.

△ 왼쪽부터, 통역을 도와준 히로유끼, 모든 일정의 통역을 맡은 토오꼬, 전체 도움을 준 키요코
이 자리를 통해 다시 한 번 고마움의 인사를 전한다.

저녁 6시 기노완 세미나 하우스(기독교센터)에 도착하여 저녁식사를 했다.

△ 첫 날 숙소인 기노완 세미나 하우스에서 평화기행의 의의를 되새기고 인사를 나눈 참가자들.
8시부터 평화기행단의 첫모임을 최선희 교육국장의 오키나와 미군기지 반대운동에 대한 브리핑으로 시작하였다. 브리핑 후 평화기행에 참가한 단원들 각자의 개인 소개가 이어졌으며, 자료집을 보며 평택의 미군기지 확장반대운동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으며, 헤노코 기지를 방문하여 그곳의 주민들에게 불러 줄 ‘평화가 무엇이냐’의 노래를 배우고 따라 불러보면서 모임을 마쳤다.
우리의 하늘을 날지마라(Don't Fly Over Our City)-U.S HELOS OUT NOW.
8월 17일 아침 9시부터 우후자토 교회의 테히라 나쯔메 목사의 안내로 중부지구의 미군기지 기행을 시작하였다.
먼저 가가즈 고대공원을 방문하여 그곳에서 세워진 오키나와 전쟁 당시 전사자들과 강제징용당하여 억울하게 돌아가신 분들을 위로하는 기념탑과 전망대에 자세한 설명을 들었다.

△ 17일, 첫 기행지는 가카즈 고대공원.
이 곳에서 테에라 나츠해 목사님으로부터 오키나와의 가슴아픈 역사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 헤노코투쟁의 주역인 테에라 목사님이 바쁜 일정을 쪼개 기행단의 가이드를 맡아주셨다.
기념탑은 일본의 우익 세력이 세운 것으로서, 조선에서 강제징용당한 사람들 중 북쪽 사람들을 제외한 남쪽 사람들만 징용자로 추모하는 왜곡된 내용이 담겨있었다. 그리고 이들이 전쟁에 억지로 끌려 온 걸 서술한 것이 아니라 식민지 정당성을 주장하며, 전쟁에 강제로 참여한 사람들에 대하여 용감히 싸워서 희생한 사람들의 정신을 미화하는 내용이 담겨 있오늘의 일본이 군국주의의 부활을 획책하는 정신적 근간을 읽을 수 있었다.

△ 가카즈공원 전망대에서 바라본 후텐마 미군기지의 활주로
가가즈 고대공원에 위치한 지구를 상징하는 모양을 한 전망대에 올랐다. 그 곳에서는 후텐마 미군기지의 전경을 한 눈에 볼 수 있었는데. 기노완시 시민들이 사는 도시 한 가운에 위치해있으며, 이는 학교, 시청이 있던 자리를 철거하고 1945년 전쟁이 끝나고 미군이 강제로 자리를 잡아버렸다고 했다.

△ 기노완 시청 옥상에 씌여 있는
'Don't Fly over Our City! U.S. Helos Out Now! (우리의 하늘을 날지 마라! 미군의 헬기는 당장 나가라!)'
기노완 시청을 방문하여 건물 옥상에 올라가 보니 옥상 바닥에는 'Don't Fly over Our City! U.S. Helos Out Now!(우리의 하늘을 날지 마라! 미군의 헬기는 당장 나가라!)'라는 글씨가 쓰여있었다. 이 글은 주변에서 훈련하는 헬기들이 하늘에서도 볼 수 있도록 옥상 전체에 크고 선명하게 써있었다. 후텐마 기지가 있는 곳은 기노완 시로서 시 차원에서 시장을 비롯하여 주민들이 후텐마 미군기지 반환운동을 벌이고 있어 우리는 기노완 시청의 기지 정책과에서 일하고 있는 담당 공무원 야마꾸지 씨로부터 후텐마 기지 반환운동에 대한 자세한 의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 기노완 시청 옥상에서 후텐마기지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는 기지정책과 야마우치 씨.
후텐마 기지는 기노완시의 시면적 25% 차지하고 있으며 군용기 52대정도가 항상 기지에 머물고 있으며, 전에는 70여대가 넘게 있었지만 지금은 이라크에 가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활주로는 2,800m이며, 헬기 중심의 기지로 기지주변을 도는 훈련이 가장 위험하며 하루평균 150여회 헬기 이착륙 훈련이 행해지고 있으며, 많을 때는 200-300회 이착륙연습을 하고 있다. 주민들이 가장 위협하는 훈련은 헬기가 미군기지 주변을 1-3시간 저공으로 맴도는 훈련을 하는데 이것은 추락사고의 위험이 있다. 결국 지난 2004년에 오키나와 국제대학에 헬기가 추락사고가 일어나 3만5천명의 시민들이 들고 일어나기도 하였다.

△ 때마침 후텐마 활주로에 미공군기가 착륙하는 모습이 보였다.
현재 기노완 시청과 시민들은 후텐마 기지 반환을 일본과 미국 정부에 요구하고 있고, 주택지 주변을 날아다니는 훈련을 그만둘 것을 제일 먼저 요구하고 있다.
또한 기노완 시가 미국에 2번을 방문하여 이러한 요구를 제기하였으나 일본 미국 정부가 받아드리지 않고 있다.
기노완 시청은 미국 내에 위치한 기지의 실태를 조사하고 있으며, 미국 내에 위치한 기지에서는 주택지 위로 헬기를 날지 못하게 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현재 미국 내 기지의 실태를 조사하여 후텐마 기지와 비교한 후 2007년 3월에 중간발표를 할 예정이며, 미국이 만들고 있는 Master Plan 또한 함께 조사 후 발표할 예정이다.

△ 기노완 시청에는 기지정책과가 있어 미군기지로 인한 문제 해결을 위해 앞장섰다.
기행단원들은 우리나라와는 정반대인 오키나와 상황에 부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기노완 시는 시청 안에 ‘기지정책과’를 두고, 기지 반환을 요구와 기지 반환이후에 플랜을 짜고 있었다. 미군기지 건설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우리 정부나 평택시청과는 전혀 딴판으로 시청이 반기지 운동에 적극적이라는 사실이 놀라웠다. 시청이 반기지 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하는 힘은 지지하고 나서는 시민들이라는 생각과 함께, 평택 미군기지 반대 운동에서 어떻게 하면 우리 국민들이 적극 지지 하고 나설 수 있는 지에 대한 고민이 정말로 크게 다가왔다. 야마구찌 상에게 평택 미군기지 확장 반대 제 4차 평화대행진을 알리는 포스터와 리플렛, 동영상 CD를 전달하고, 오키나와와 평택이 함께 미군기지 반대에 연대하고 싸워 나갈 것을 확인하였다.

무기하나 없었던 류큐왕국 - 진정한 평화의 나라 오키나와

점심식사를 하러 가는 버스 안에서 오키나와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략하기 위해 다른 나라에 도움을 요청하였으나 류큐왕국(오키나와)은 그 요청을 거부하였다고 한다. 그 거부로 인해 일본의 류큐왕국 침략이 이어졌다.
당시 오키나와를 방문했던 나폴레옹의 보고서에는 오키나와가 무기가 없는 평화로운 나라라고 기술되었다는 설명을 들었다. 이렇게 무기를 갖고 있지 않는 평화로운 나라가 다른 나라를 침략하기 위한 전쟁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이유로 일본에게 침략 당하였고 결국 하루 만에 점령당했다. 무기를 전혀 갖고 있지 않았고, 그리고 다른 나라의 평화를 위해 침략을 거부하여 결국 자신들의 나라가 점령당한 오키나와 사람들의 평화를 사랑하는 마음이 참 아름다웠다.


△ 가데나역 옥상에서 바라본 가데나 공군기지 활주로. 마침 F-18 전투기가 착륙하고 있다.
가데다 미찌노에기(가데다역)의 미군기지 자료관을 방문하였다.
미군기지 자료관은 가데다 미군기지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으며, 4층 옥상에 기지를 향하여 CCTV가 설치되어있다. 이 CCTV는 이 곳 주민들이 미군기지 내에서 사고가 일어나는 것을 감시하는 목적으로 설치하였다.

△ 오키나와 주민들이 가데나역 옥상에 설치한 감시카메라는 24시간 가데나 미공군기지 활주로를 향해 있다. 주민과 관공서의 이러한 노력은 미군훈련으로 인한 사고를 상당부분 줄이는 역할을 하고 있다.
주민들의 CCTV 설치를 가능했던 이유는 주민들의 미군기지 반대의식이 설치 정도로만 그칠 거라고 미군이 생각했기 때문이라는 설명을 들었다.
그러나 오히려 주민들은 일본정부가 미군기지가 있는 마을에 위로금 차원으로 지원하는 보조금을 이용해 미군기지 자료관을 운영하면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미군기지 반환싸움을 알려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오후 3시경에는 한의 비를 방문하였다. 한의 비는 1944년 6월경에 경북지역에서 오키나와로 강제징용된 분들의 넋을 기리는 추모비였다. 이 비는 오키나와 사람들이 조선징용자와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온 분들의 아픔을 더 이상 외면하지 않고 함께 끌어안고 위로하기 위하여 한국의 유족들과 함께 건립하였다. 2006년 5월 13일에 제막식이 있었고 경북 영양에도 같은 추모비가 세워졌다.
그 다음으로 요미탄 기지를 방문하였다.
요미탄 기지는 북,중국, 러시아의 인공위성의 송수신을 감시하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기지로 그 기지의 형태로 인해 일명 코끼리 우리(elephant cage)라고 불리는 기지다.

△ 코끼리 우리의 모양처럼 생긴 요미탄 기지 
이 기지는 반년 후 시설이 반환되어 북부의 캠프한센으로 이전될 예정이다.
반환이 되는 이유는 이 기지에 속하는 땅을 가진 주인들이 자신들의 땅이 전쟁기지로 쓰여지는 것을 반대해왔기 때문이다. 그 중 강력히 반대운동을 전개해온 치바나 쇼이찌라는 땅주인은 우리 평화기행단이 방문한 2주전에 자신의 땅을 반환받았다고 한다.
일본은 미군기지로 필요한 땅을 정부가 매입한 후 미군에게 주는 우리나라와 달리 땅주인들과 미군이 직접 임대계약을 맺고 기지에 필요한 땅을 빌려준다고 한다. 그러기에 주민들이 미군기지의 땅을 돌려받을 수 있었다.
요미탄 기지 일대는 인공위성의 감시와 더불어 트럭, 탱크, 사람이 낙하연습을 함께 하는 곳이었다. 그러나 이 기지안에 농민들이 몰래 들어가 농사를 지었고 이러한 낙하연습으로 농작물에 피해가 있었으나 농사를 묵인해주어 농민들이 항의를 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낙하연습은 밤에는 불꽃으로 낙하지점을 표시하고, 그 곳으로 낙하하는 연습을 한다. 이에 마을 주민들은 불꽃을 여기저기 피어놓아 야간 연습을 중단시켰고, 낮에는 인분을 여기저기 뿌려놓아서 낙하연습을 방해하였다. 이러한 주민들의 낙하연습반대에는 야마우찌 도꾸신이라는 마을 이장의 지도가 있었다.
이 야마우찌 도꾸신 이장의 또 다른 재미있는 일화를 이야기 해주었다.
도꾸신 이장이 기지 가운데에 마을 회관을 건설하기로 마음먹고 주민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말하자 주민들은 그 계획은 무리라고 비웃었다. 이에 도꾸신 이장은 미국의 백악관으로 직접 찾아가 마을 회관을 짓게 해달라고 요구한다. 여러번 찾아가고 또 찾아가니까 백악관에서는 귀찮은 나머지 오키나와 사령관에게 직접 허가를 구해보라고 책임을 미뤄버린다. 도꾸신 이장은 오키나와 사령관을 찾아가 오키나와 신이 그 곳에 마을회관을 지으라고 자신에게 말했으며, 결국 마을회관 건립이 신의 뜻이라고 주장한다. 이 말을 들은 오키나와 사령관은 미국의 원주민 출신으로 도꾸신 이장의 말을 믿고 마을회관의 건립을 허가한다. 그래서 요미탄 기지 가운데는 마을회관이 생겨났다.

 
△ 도꾸신 이장이 마을 주민과 세운 마을회관
요미탄 기지 일대는 미군기지라고 표시한 작은 나무 표지판 외에는 그 어떤 것도 미군기지임을 알 수 있게 해주는 표시가 전혀 없다. 마을회관과 도로와 그 위를 달리는 차량들을 보면 한적하고 평화로운 시골마을처럼 느껴졌다.
아마도 이 마을의 주민들이 조직적으로 열심히 미군기지 반대운동을 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요미탄 기지 일대를 둘러보는 것으로 17일의 기행을 마무리 지었다.
기행단 일행은 숙소인 사시키 교회로 돌아와 저녁식사 후, 빙 둘러앉아 그 날의 일정에 대해 총화하는 시간을 가졌다.
8월 18일
오전 10시부터 평화기행단은 하에바루 조에 위치한 하에바루 문화센터를 찾았다.

△ 하에바루 문화센터를 둘러보고 있는 평화기행단
하에바루 문화센터는 하에바루 조에서 운영하는 것으로 하에바루 조의 풍물과 역사적 유물들이 전시된 곳이다. 이 전시물 중에는 이 지역의 하에바루 고등학교 학생들이 문화제를 위해 마을에 대한 조사를 한 후 문화제때 전시를 하고, 전시 이후에 전시물들이 유실이 될 거 같아 기증해서 함께 전시된 것들이 있었다. 오키나와 주민들이 오키나와전 당시 폭격을 피하려고 동굴로 피신을 많이 했는데. 동굴 안에서 피신생활 중 사용했던 물건들이 전시되어있었다. 유물들을 둘러보면서 참혹했던 그 당시의 상황을 그대로 보는 듯 하였다.
테헤라 나쯔메 목사님은 문화센터를 돌면서 오키나와전쟁의 참혹했던 상황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셨다
1944년 10월 10일 오키나와에 위치한 나하 병원이 폭격을 당해 병원 이용이 어려워지자 하에바루 지역의 이도가즈 동굴로 병원을 옮겼다. 당시 미해병대는 일본군 전력의 약화를 목적으로 부상자를 더 많이 만들었다고 한다. 오키나와전에서 일본군 전사자는 5만에서 6만으로 추산되며, 이중 부상자 5천에서 1만명은 일본군이 죽였다고 한다. 부상자로 인한 전력약화를 염려하고 기밀유출을 막기 위해서라는 이유였다.
이도가즈 동굴에 있었던 3천명의 일본군 부상자는 이러한 목적으로 몰살당했다고 한다.
지금은 히로시마에 살고있는 그 당시 일본군 출신의 사람에게 들은 이야기였는데, 동굴에 인접한 마을의 12-19세 정도의 여학생들이 동굴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했다고 한다.
그리고 전쟁당시 10살이었던 할아버지에게 들은 이야기를 전해주었는데, 이 할아버지는 당시 일본군 병사로 일했다고 한다. 나쯔에 목사님이 이 할아버지께 “스스로 일본군 병사라 생각한건 아니냐?”라고 질문을 하니 이 할아버지는 본인은 당시 일본군 상관의 명령을 받았고 그래서 자신은 군인으로서 일한 거라고 답했다고 한다.
이 할아버지가 일본군 상관에게 받았던 명령은 일본군 병사들이 총알이 떨어지면 동굴 밖으로 나가서 죽은 병사의 주머니 안에 남겨진 총알들을 모아서 가져오라는 것이었다.
명령을 받고 총알을 가져와 보니 명령을 했던 상사가 죽어있어서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려고 묻고 다니다가 동굴근처에 폭탄이 떨어져 왼팔이 크게 다쳤다고 한다. 그래서 동굴안에서 부상자들에게 했던 치료방식대로 일단 죽은 병사에 묶여있던 붕대를 풀러 다친 팔에 두르고 나무줄기로 묶고 다친 손을 스스로 칼로 잘라버렸다고 한다. 팔을 절단할 정도의 부상이었는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으나, 10살 소년이 행한 행동으로서는 당시의 상황들이 얼마나 참혹했었는지를 보여주는 거라 생각되어 가슴이 아팠다.
이도가즈 동굴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유골은 현재까지 계속 발굴되고 있다고 한다.
당시 폭탄이 폭우처럼 마을에 많이 떨어졌다고 한다. 폭우처럼 떨어지던 폭탄으로 인해 세상이 온통 눈처럼 하얗게 재가 되어버렸다고 한다.
전쟁당시 일본군의 방식은 전투지에서 필요한 물품을 보급받는 것이 아니라, 현지에서 조달했다고 한다. 따라서 해당 지역의 주민들의 식량과 생활에 필요한 물품들을 마구잡이로 약탈했다고 한다.
당시 일본군은 남부지역의 9만 여명 아이들을 피난이라는 이름으로 대만과 일본 본토의 말라리아가 창궐하는 곳을 보냈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아이들을 안전한 곳으로 피난을 보냈다고 생각하였으나, 그게 아니라 9만 여명의 아이들을 확실하게 죽이기 위해서, 그래서 그 아이들의 숫자만큼 일본군의 식량을 손쉽게 조달하기 위한 목적이었다고 한다.
결국 일본군은 나라를 지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에 철저히 복무하기 위해 존재하였다.

△ 이도가즈 동굴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는 평화기행단

△ 이도가즈 동굴 안을 둘러보면서
하에바루 문화센터를 둘러본 후 이도가즈 동굴을 찾았다. 동굴 안은 병원으로 사용되어서 각 병동별로 공간이 나누어져 있었고, 각 공간별로 어떤 사용처였는지 설명하는 팻말이 세워져 있었다. 동굴 안을 둘러보면서 억울하게 희생된 일본군 병사와 주민들의 이야기를 알고 가서인지 너무 어둡고 음산한 기운에 둘러보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점심식사를 한 후 오후 2시가 조금 넘는 시간에 평화공원을 찾았다.
공원에 도착하여, 전쟁당시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한 꽃을 샀다. 먼저 평화공원안의 1975년 8월 한국정부의 박정희 대통령이 건립한 위령탑을 찾아갔다. 이 위령탑의 위치가 전에는  공원 앞 버스 유턴하는 곳에 있어 소외되었으나, 현재는 근처에 평화 자료관을 세우면서 외관상으로는 공원 안에 세워진 것으로 되었다.

△ 평화공원에 대해 설명해주시고 계시는 나쯔에 목사님
이러한 위령탑은 히로시마, 나카사키의 평화공원에는 공원 안에 세워지지 못하고, 밖에 세워졌다. 조선인 강제 징용자와 일본군 위안부를 추모하는 위령탑을 공원 밖에 세우는 것은 일제시대 당시 조선에 자행한 만행의 역사를 인정하지 않고 외면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표면상으로 히로시마와 나카사키 평화공원의 디자이너가 디자인상의 문제로 공원 안으로 이동하는 것을 반대하였으나 현재는 공원 안으로 옮겨졌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 박정희 대통령이 세운 위령탑  
위령탑 근처에 세워진 평화 자료관은 이곳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일본 정부가 자신의 부끄러운 역사를 감추고 국민을 어떻게 속이고 기만하는 지를 보여주는 곳이라고 한다. 이러한 현실을 알기 위해선 들어가서 보는 것도 좋지만, 그렇지 않다면 들어갈 필요가 없다는 설명을 들었다. 평화자료관은 야스쿠니 신사처럼 일본군국주의의 부활을 목적으로 건립되어 그 성격에 맞춰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리고 한국정부가 건립한 위령탑 또한 박정희 군사정권이 건립한 것으로 희생자들을 향한 묵념을 다른 곳에서 드리는 것이 더 좋겠다는 제안을 하셨다.
그리고 어제 우리가 갔던 한의 비가 오키나와 주민들과 유족들이 필요하다고 세운 곳이라는 설명과 함께 날씨가 매우 더워 시원한 평화기념관 1층 로비에서 오키나와전 당시 상황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다.
평화기념관 1층 로비바닥에 오키나와전 당시에 내린 폭탄-불발탄 이 전시된 그 위에 빙 둘어 앉아 설명을 들었다. 아직까지 불발탄의 발굴이 이뤄지고 있는데, 불발탄은 자기 검색기로만 검색해서 찾아내야하며 매우 위험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발탄 전시된 바로 위에 둘어앉아 설명을 듣고 있는 평화기행단
오키나와전 당시, 주민들의 집단자결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집단 자결은 일본군이 관동군의 남경대학살과 살아서 미군과 영국군의 포로가 되면 어떠한 고초를 겪게 되는지 이야기하며 포로가 되면 어떻게 되는 자세히 설명을 받고 그러니 그런 일을 겪지 않으려면  자결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이에 오키나와 주민들은 가족들을 서로 죽였다. 무기가 없어서 옆에 있는 돌로 서로를 죽였지만 가족이외의 사람은 죽일 수가 없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자기 가족은 애정과 책임이 있어 가족 중 누가 포로가 되어 고초를 겪는 것을 보느니 차라리 서로를 죽이는 것이 낫다고 생각해서 죽일 수 있었지만 다른 사람은 죽일 수가 없었다고 한다.
전쟁 이후 집단 자결에 대한 이야기는 전해지지 않았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자신의 손으로 가족을 죽였다는 죄책감으로 말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몇 년 전 일본정부에서 오키나와에서의 집단 자결은 없었다고 발표하였고, 이에 피해자들은 더 이상 침묵하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하였다.
오키나와에서 살고 있는 긴조 상은 전쟁 후 몇 십년동안 자기 가족의 자결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못했었다. 긴조 상은 형과 함께 가족을 돌로 쳐서 죽이고 돌아왔다고 한다. 그리고 주민과 같이 죽겠다던 일본군은 미군에게 백기를 들고 투항하는 모습도 함께 보았다고 증언했다. 오키나와에서 살아오면서 일본군의 잔인함과 미군이 얼마나 무서운지 안다고 한다. 나쯔에 목사님은 결국 한국군대도 잔인하다는 것을 알아야한다고 주장했다. 착한 군대라는 것은 세상에 존재할 수 없으며, 군대에 가면 착한 사람도 변할 수밖에 없다는 말과 함께 오키나와사람으로, 일본의 국적을 가진 한 사람으로, 일본군대가 조선에 저질렀던 만행을 인정하고 사과하셨다. 그리고 일본군대의 잔인함을 이야기하고 평화를 호소하기 위해선, 그리고 그런 잔인한 만행이 다시 일어나지 않게 하려면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서로 손을 잡고 함께 평화를 외쳐야한다는 이야기를 하셨다.

계에서 하나밖에 없는, 전쟁 당시 피해자와 가해자의 구분없이 모든 희생자들의 이름을 새기고 있는 비석
평화기념관 밖으로 나와 희생자들의 이름이 새겨진 비석을 둘러보았다. 그 비석들은 전쟁 당시 희생된 사람들의 이름을 피해자와 가해자를 구분 없이 이름을 새겨놓은 비석은 세계에서 오키나와 평화공원 밖에 없다고 한다. 다른 평화공원은 자기 나라의 희생자의 이름만 새겨놓는 비석을 세운다고 한다.
처음 이 비석을 세운 오키나와 지사는 이 비석은 전쟁 자료로서 명단을 새긴 것이니 묵념을 하는 등의 감정 표현을 하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야스쿠니 신사처럼 일본의 군국주의 부활에 이용되는 것을 경계하려는 목적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유족들이 찾아와 자기 가족의 이름을 보고 눈물 흘리는 것을 보며,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비석에는 오키나와 사람들뿐만 아니라 미국, 일본, 영국, 우리 한국까지 있었다. 현재는 24만 명의 이름이 새겨진 상태이며 희생자는 지금도 계속 조사되고 있으며, 매년 6월마다 조사된 명단을 취합하여 새겨 놓는 작업을 하고 있다고 한다.

선 강제 징용자들의 이름이 새겨진 비석앞에서 설명을 듣고 있다.
우리는 당시 조선 강제징용자로 끌려와 희생된 분들의 이름이 새겨진 비석을 찾아갔다. 그 곳엔 북의 조선인민공화국과 대한민국이 구분되어 희생자들이 이름이 새겨져있었다. 약 500여분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비석에 빼곡히 희생자들의 이름을 새겨놓은 다른 나라들과 달리 우리나라의 비석 대부분은 텅 비어있었다.
한국은 오키나와전 당시 끌려온 조선의 강제징용자 중 1만 명의 명단을 일본정부에 문서로 보냈다고 한다. 일본 정부는 이 문서를 받아 불태워버려서 제대로 전해지지 못했다고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안타까운 것은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와서 희생된 분들의 명단은 없다고 한다. 현재는 조사에도 어려움이 많지만, 이름을 알아도 유족들이 이 곳에 이름이 새겨지는 것을 허락에 쉽게 동의하지 않는다고 한다.
오키나와는 조선에서 끌려온 일본군 위안부와 강제징용자들의 문제를 외면하려 했으나 이제는 그렇게 하지 않기로 마음먹고 주민들도 이러한 역사를 알아야한다는 움직임을 계속 보이고 있다.
그 곳에 우리는 준비해온 꽃으로 헌화를 하고, 향을 피운 후 조의를 표했다.
그리고 비석을 둘러보며 소감을 이야기하는 도중, 일본의 누카가 후카로 방위청 장관이 그곳을 찾아온 것을 알게 되었다. 이에 나쯔에 목사님은 누카가 방위청 장관을 향해 오키나와에 미군기지는 필요 없으니 도쿄로 가지고 가라고 소리치셨고, 평화기행단의 이낙호 선생님도 전쟁에 대한 아무런 반성 없이 또다시 전쟁을 일으키려하냐고 소리를 치시며 시위를 벌이셨다.
과거 역사를 청산하지 않은 채 미국과 함께 전쟁을 획책하려는 일본 정부의 뻔뻔한 모습에 분노하고 이런 현실 속에서 우리의 위치와 과제에 대해 고민하는 계기가 되었다.
저녁 6시 우후자토 교회로 자리를 옮겨 테헤라 나쯔에 목사님에게 헤노코 기지 저지 운동이 어떻게 이뤄졌는지에 대한 강연을 들었다. 강연내용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헤노코의 해상기지 건설을 저지시키기 위해 지난 8년간 운동을 벌였다. 소리만 지르는 반대운동이 아니라 완전 저지 비폭력운동을 벌이고 있다. 완전 저지 비폭력이란 자신이 죽게 된다고 해도 폭력 사용을 하지 않으며 완강하게 기지건설을 저지시키는 것을 말한다.
3년 전부터 기지를 건설하려는 방위사업청의 움직임으로 인해 준비를 시작했는데, 효과적인 투쟁방법을 고민하면서 연구를 했다. 그러다가 길을 가다가 다친 사람을 보고 돕지 않고 지나쳐도 법에 걸리는 행위는 아니지만, 바다에 빠진 사람을 돕지 않고 지나치면 법에 의해 처벌받는다는 조항을 발견하고선 이법을 가지고 투쟁하기로 하였다.
바다에서는 배를 가진 사람보다 물에 빠진 사람이 더 중요하며 물에 빠진 사람을 발견하면 즉시 조업을 중지하고 구조해야한다. 그래서 기지건설 저지를 위해 계속 물속에 들어가 수영을 하는 것은 어렵고 카누를 타는 연습을 시작하였다. 카누는 5-10분 정도 연습하면 여러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이 가능하지만 같은 자리에 머무르는 것이 어렵다. 그리고 바다 파랑의 움직임을 보며 조절하기가 가장 어렵지만 파도가 심해도 계속 같은 자리에 머물러 있는 연습을 하였다. 기지 건설 저지를 위해 사람들이 모였는데, 20대부터 70대까지 다양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이들 대부분이 수영조차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수영도 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모여 카누 연습을 시작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나하 방위시설청은 기지건설에 착수하기 위해 1월 19일, 오전 9시에 헤노코를 들어오기로 하였다. 방위시설청의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한 계획을 전날 밤에 모여 세우고, 당일날은 새벽4시부터 준비하였다. 나하 방위시설청에서는 오전 9시가 아니라 새벽 5시에 트럭 20대로 들어왔다. 20대의 트럭에 100여 명의 사람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나하 방위시설청이 들어오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사람들이 속속들이 모이기 시작하였다. 그 중에는 92세의 할머니도 저지를 위한 연좌시위에 동참했다.
그동안 카누 연습을 하던 사람들은 7개의 카누에 옮겨 타고 해상으로 들어오는 기지건설을 위한 작업 선박을 막으러 바다로 나갔다. 2시간동안 해상시위를 벌이다가 카누 1대가 뒤집어 지면서 오전 10시경 방위시설청의 진입은 중단되었다. 그때 모인 인원은 250여명 정도가 되었다. 결국 기지건설을 위한 작업은 중단되고, 방위시설청 사람들은 돌아갔다. 그래서 조직행동을 벌이던 250여명의 사람들 중 15명만 남고 남은 사람들은 각자의 일터로 돌아갔다.
하지만 돌아갔던 방위시설청 사람들은 11시에 다시 진입을 시도하였고, 남은 15명이 20대 트럭 100여명의 사람들을 막기 위해 폭력을 사용하였다. 결국 방위시설청 사람들을 막아내긴 했지만 폭력을 사용하여서 깊은 반성을 했다. 이 세상에서 폭력과 전쟁이 없어지길 바라는 사람들이 폭력을 사용해 막아냈다는 사실을 반성했다. 비폭력을 지켜내지 못했다는 것을 반성하고 다시 비폭력으로 저지행동에 나설 것을 결의했다.
그 이후 해상 투쟁의 방식은 카누가 뒤집어 지는 실수를 만회하기위해 모터 보트에 카누를 연결해서 이동을 하였다.
방위사업청은 선박을 이용하여 진입을 시도하고 해상 기지 건설의 기초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해상기지 건설의 기초작업으로 기본적인 구조물을 만들었는데, 이러한 구조물 작업에 필요한 파이프를 바다로 던졌다. 저지 행동을 하던 사람들은 바다로 던져지는 6m 되는 파이프를 맨손으로 잡아내면서 손을 심하게 다쳤다.
방위시설청은 바다속으로 던진 파이프들을 모아 아시바를 만드는 작업을 진행했다. 이 작업을 막기 위해 바다 밑 4-5m 밑으로 산소 마스크없이 없이 내려가 파이프를 잡아내는 행동을 2명이 번갈아 하였다. 깊은 바다 속에서 파이프를 잡고 있으면서 숨을 못 쉬어서 죽을 것만 같은데 이렇게 죽어야하나, 살아서 저지행동을 계속 해야하나하는 갈등으로 괴로웠다.
나중에는 다이빙 옷을 입고 산소통을 매고 내려갔다. 총 150여회의 다이빙을 했는데 그 와중에 방위시설청 사람들은 산소 마스크를 빼려는 시도와 함께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했다. 그래서 카메라 기자에게 부탁하여 같이 내려가니 방위시설청의 바다 속 폭력행위는 줄어들었다.
이러한 투쟁속에서 방위시설청에서 작업하러 오는 인부들에게 “우리는 서로가 적이 아니다. 당신들은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이런 일을 하고 있는 거”라고 말해주었다.
결국 나중에는 방위시설청에서 나온 사람들과 친구가 되었는데 방위시설청에서는 이걸 알고 새로운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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