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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9. 19] 부산평통사 7차 평화발자국 "친일매국을 꾸짖다"

평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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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쟁과 분단의 현장을 찾아 평화와 통일의 희망을 심는다

     

    (광복 70년, 분단 70년)

    2015 부산 평화발자국

    "일제에 맞선 부산사람들"

     

    7차 평화발자국

    "친일 매국을 꾸짖다"

     

    2015년 9월 19() 오전 10~오후 3


    이번 평화발자국은 항일투쟁에 나선 부산사람들을 모질게 탄압한 친일인사들의 이야기입니다.

    27명의 참가자들은 부산역 분수대에 모여 일정을 확인한 후 제일 먼저 신간회와 부산 여자청년회 창립 등 당시 거의 모든 행사를 치러냈던 부산청년회관 자리를 찾아나섰습니다.

    이곳에서 양화니 해설사가 배정자와 박춘금, 하판락, 노덕술의 친일행각을 소개했습니다.

    배정자는 1870년 2월 23일 경상남도 김해에서 태어났습니다. 오랫동안 밀정을 하면서 다양한 이름을 사용했는데, 대표적인 이름은 배분남, 배계향, 조난석 등입니다. 1883년 경상남도 양산군 통도사에서 출가했는데 1885년 일본인 밀정 마쓰오의 도움을 받아 일본으로 건너갔고, 1886년 12월에 일본 오사카 천황사 소학교에 편입했습니다. 1887년 9월 이토히로부미 밑에서 밀정 교육을 받았고, 1893년 귀국해 이듬해 일본군의 밀정으로 청일전쟁에 참가했습니다.

    이토의 밀서를 고종에게 전달한 밀서 사건으로 1905년 2월부터 10월까지 부산 절영도에 유배된 적도 있던 배정자는 책이나 영화에서 주로 접했지 학교에서는 배우지 않은 인물입니다. 이토 히로부미의 양녀(대외적인 이름)였지만 실은 내연녀로 보입니다. 처세술에 탁월했고 마지막 죽을 때 까지도 조선의 어린여자들을 정신대로 보내는 일을 했던 뼛속까지 친일 밀정으로 키워진 엘리트 스파이였습니다. 배정자는 한국과 일본, 만주 등 어느 곳에서나 생존할 수 있도록 철저히 밀정교육을 받은 변신의 귀재였고 직업 외교관, 마적단, 무장조직 운영 등 다양한 이력을 가진 인물입니다. 70대에도 20대 젊은 청년 장교와 결혼해 살다 1949년 2월 서울 돈암동 자택에서 반민특위 특경대에 체포되어 그해 4월 고령을 이유로 보석으로 석방되었으나, 1952년 2월 27일 사망했습니다.


    박춘금은 1891년 4월 17일 경상남도 양산에서 태어나 밀양에서 자랐습니다. 1905년 경상북도 대구의 일본군 병영에서 급사를 지냈고, 1907년 8월경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와 고베 등지에서 토목 노무자, 자전거직공, 탄광 갱부 등을 전전하며 생활했습니다. 이후 폭력배로 성장해 나고야에서 조선 인삼 판매업에 종사하다가 1917년 5월 나고야 조선인회 회장에 취임하였습니다.

    당시 흑룡회 계열의 낭인 우두머리인 도야마 미츠루와 교분을 맺으면서 ‘나고야 조선인의 오제키’라고 불릴 정도로 나고야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관부연락선을 타기 위해 노동자들에게 필요했던 도항권 발급 이권에 깊숙이 관여하여 백산 안희재 선생이 그 사실을 알고 총독부에 들어가 도항권을 폐지시켜 조선인이 피해를 보지 않게 한 적도 있습니다.

    참가자들이 찾은 청년회관은 박춘금의 상애회 부산지부의 친일 악행을 막기 위해 조선인들이 궐기대회를 했던 장소이기도 합니다. 야만의 시대에 살던 박춘금은 이후 일제가 국민개전태세를 강화하기 위해 조직한 국민의용대의 조선총사령부 참여에 임명되었습니다.

    그는 해방 후 일본으로 도피했고, 1949년 7월 반민특위가 반민족행위 피의자로 지목해 맥아더 사령관에게 체포하여 송환해줄 것을 요청한 인물입니다. 그는 이후 토쿄 민단 중앙본부 고문을 맡았습니다. 1955년 6월 조국통일촉진협의회를 조직했고, 1957년에는 일한문화협회를 설립하고 상임고문을 맡았습니다. 1962년 도쿄에 있는 아세아상사의 사장으로 재직했으며 1973년 3월 31일 사망했습니다.

    두 사람은 일제 강점기 초법적으로 친일을 일삼던 사람들입니다. 박춘금은 밑바닥 사회적 약자, 특히 노동자를 등처먹으며 백색테러와 이권개입으로 치부하고 재일한국인들을 폭력으로 장악해 참의원을 두 번이나 했던 정치조폭의 원조였고 배정자는 밀정교육으로 완벽 변신하여 이토 히로부미와 일본을 위해 상상을 초월한 공작원으로 활약합니다. 둘은 친일 중에도 가장 어두운 음지에서 민족에 위해를 끼친 독버섯이었습니다. 


    참가자들은 봉고버스 두 대에 나누어타고 부산경찰서로 향했습니다. 현재의 중부경찰서가 옛날 부산경찰서 자리입니다. 이곳 정문 옆에서 당시 부산경찰서에 근무했던 악랄한 고문 기술자인 하판락과 동래경찰서 노덕술에 대해 김욱 해설사가 이야기를 전개했습니다. 

    하판락은 2000년 1월 17일 <대한매일>과의 인터뷰를 통해 “일제 경찰 간부를 지낸 일을 부끄럽게 생각하며, 나로 인해 피해를 본 사람들에게 사과하고 용서를 빈다”며 잘못을 시인한 대표적인 친일 경찰입니다. 해방후 미군정청 시절에 적산가옥 처분책임자로 돈을 벌어 기업가, 자선사업가로 활동하며 부산 시장상을 받기도 했던 인물로, 2003년 91세로 죽을 때까지 진주 하씨 집안의 화수회 회장으로 지내며 악명 높은 일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는 착혈고문까지 자행했습니다. 애국인사가 끌려오면 주사기로 피를 뽑고 그 피를 애국인사의 몸에 뿌리며 공포분위기를 조성한 후에 고문과 취조를 시작했습니다.

    노덕술은 고문경찰에다 부패경찰의 표본이었습니다. 노덕술의 외삼촌이 친구를 죽인 정황이 뚜렷함에도 수사를 하지 않고 사건을 해결해 주겠다며 돈을 받아 챙겨 사기죄로 고소당한 적도 있습니다. 영화 <암살>에서 친일파 염석진이 반민특위에 체포되었다 석방되어 경찰의 도열을 받는데 이 장면은 친일경찰 노덕술을 연상시킵니다.

    1899년 태어나 1920년 경상남도 순사에 임명되고 1933년 경감이 되었는데 1943년 당시 2만여명 경찰 중 조선인 경감이 86명에 불과한 정황에 비추어 학력도 없는 노덕술이 승진할 수 있었던 것은 일제 눈에 들기 위한 필사적 노력을 했기 때문입니다.

    시 노덕술은 사법계 주임이었는데 공안이나 시국사건을 맡는 고등계가 출세에 유리하다는 걸 알고 공안사건 처리를 주로 했습니다.

    1927년 신간회 동래지회 사건 때 노덕술의 고문을 받아 죽은 독립운동가가 3명이나 되었고, 혁조회 사건 때 9명을 고문해서 3명이 후유증으로 사망했습니다. 고문기술의 70% 가량이 노덕술의 기술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그의 고문 방법은 잔인하였습니다. 좁은 상자에 가둬두고 밖에서 못을 박는 고문, 피해자의 혀를 잡아 빼거나 머리카락을 뽑는 고문, 손을 앞으로 발을 뒤로 묶어놓고 매달아 놓은 다음 구타하거나 물을 먹이는 고문 등 다양한 방법으로 독립투사를 잡아 고문하여 인간성을 완전히 망가뜨리고 황폐화시켜 일본인들 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였습니다.

    해방 후 이승만 대통령이 “노덕술은 반공투사”다며 수도경찰청 수사과장과 육군 범죄 수사담당을 맡겨 ‘반이승만 세력’ 숙청과 ‘좌익분자’ 검거 등을 주도했습니다. 의열단을 만들어 항일독립운동을 치열하게 벌였던 약산 김원봉 선생을 체포하여 갖은 고문을 하고 뺨을 때려 수모를 주기도 했는데, 이 사건으로 김원봉 선생이 원통하여 3일간이나 울었다고 의열단 유석현 선생이 회고록에 남긴 일화가 있습니다.

    해방 후 그는 자신의 악행들에 대해 단 한번도 처벌받은 적이 없이 온갖 호사를 다 누렸습니다. 미군정청에서 적산가옥을 매각할 때 관여하여 재벌들이 불하받게 하는 일도 하고 4.19혁명 이후 치러진 제5대 국희 민의원 선거에 출마까지 했으나 낙선하고 1968년 4월 1일 69세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이들의 특징은 애국인사를 극악하게 고문한 댓가로 신분상승을 꾀한 냉혈 살인마라는 것입니다. 그들을 만든 것은 일본조선총독부 식민지 정책자들의 책략이었습니다. 이런 역할을 자신들이 하지 않고 조선인에게 맡겨 해방 후에도 일본인에 대한 공격보다 조선인 앞잡이에 대한 공격이 많았던 것을 보면 그 속내가 보입니다. 해방 후 그들은 미군정에도 이승만 독재 정권에도 똑같이 쓸모있는 개가 되고 오히려 더 출세합니다. 모든 경찰 요직을 다 거치고 마침내 둘 다 국회의원 출마까지 하고 부귀영화를 누립니다. 여기에 정의는 없었습니다. 지금까지도 그 흐름은 유지되고 있습니다.


    참가자들은 지방문화재인 성공회성당에서 점심을 나눈 후 근대역사관 건너편 곡물난전이 있던 곳 부근 일본헌병대 자리에서 군대의 친일매국인사에 대한 얘기를 시작했습니다.

    전라북도 익산 출신 신상묵은 대구사범학교를 나와 교사로도 활동하다 군사학교를 졸업하여 헌병총수까지 지내며 수많은 보조원을 두고 철저하게 친일파가 되어 독립군 잡는 일을 했던 인물입니다. 출신학교와 직업도 같았지만 박정희와 아주 비슷한 행태를 보이던 인물이었습니다. 그 자손들까지 현재 정치 거물이 되었습니다. 그와 함께 짝이 되어 고문에 나선 이가 박종표(일본명 아라이)입니다. 그의 고문행태는 충격적이어서 얘기를 들으면서 구토를 할 정도로 힘들어하는 분도 계셨습니다.

    반민특위의 기록에 의하면 연행되자마자 무차별 구타가 시작되고 엎어치기로 패대기쳐서 기선을 제압하고 식도에 호스를 꼽고 강제로 먹인 후 배를 눌러 토하게 합니다. 욕조에 물을 채워 완전히 얼린 후 사람하나 앉을 공간을 파서 앉혀 놓은 뒤 얼음물을 계속 끼얹고 실신하면 부채질해 깨운 다음 얼음물을 다시 붓습니다. 심지어 불에 달군 화로를 얹어 놓거나 불로 살을 찢고, 허공에 매달아 놓고 폭행, 전기고문, 관 속에 피해자를 넣고 구멍을 뚫어 물을 주입하여 죽음 직전까지 가게 하고, 맹견이 있는 방에 넣고 사람을 물어뜯게 했습니다.

    부산세무소 사건에서는 독립운동 조직의 김대근이란 사람이 유언비어를 흘렸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고문치사했습니다. 여기에서 고문과 죽음의 과정이 적나라하게 등장합니다. 사망 후 그의 몸은 흑색이었고 불로 찢은 상처가 가득하고 혈관이 파열된 곳에 탈지면으로 막고 전신이 붕대로 감겨 있었습니다. 부산학생사건, 무궁당 사건이 대표적입니다. 박종표는 후에 승승장구하다. 315부정선거 때 마산에서 김주열의사의 시신을 유기한 사람입니다. 김주열의 시신이 허술하게 묶은 돌이 빠지면서 마산 앞바다에 떠오르고 이것이 도화선이 돼 4.19가 일어납니다.

    대부분의 다른 친일 인사들처럼 이 두 사람은 해방 후 오히려 더 승승장구해 경찰요직을 두루 거치고 신상묵은 후에 기업가가 됩니다.

     

    참가자들은 다시 차에 올라 부민초등학교 뒤편에 있는 항서교회를 찾아 37년 동안 봉직하다 퇴직한 김길창 목사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는 부산교육계의 친일 거물급 인사입니다. 현재도 존재하는 대부분의 부산 사학에 영향력을 미쳤습니다.

    김길창은 경상남도 고성에서 태어나고 대구 계성학교에 입학했으나 중퇴한 이후 창원 등지에서 호주장로회 선교사 밑에서 조사로 있으면서 1915년 경남 성경학교를 졸업하고 1919년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들어가 1923년에 졸업합니다. 1919년 3.1운동 때 평양장로회 신학생이였던 김의창이 우편으로 보내온 독립신문을 지인들에게 나누어 주다가 마산경찰서에 10일간 구류된 적도 있고 ‘무기 은닉 및 반일 선동’ 혐의로 7일간 유치장에 갇혔다가 무혐의로 풀려난 적도 있습니다. 그는 이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후 보여준 모습은 친일의 선봉이었습니다. 깃발 들고 앞장서 친일애국을 설교했습니다. 1934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부회장에 선출되고 1935년부터 1936년까지 연희전문학교 이사도 겸했고 1938년 9월 10일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부회장으로 각 노회 종대들을 이끌고 평양신사에 참배를 합니다. 이후 김길창은 37년동안 부산 항서교회 담임목사로 있으면서 교단을 친일로 바꾸어 ‘대동아전쟁과 기독교’라는 주제로 강연도 하고 ‘조선장로교호‘로 명명한 사람 죽이는 비행기를 교단이름으로 헌금을 헌납한 대표적인 친일목사였습니다.

    방 후 본인이 부산에서 운영하던 미시마고등실업학교 재산 일체를 인수받아 남조선고등여학교로 개칭하여 운영하고 1949년 남조선여자중학교로 다시 개칭했다가 1951년 남성여자중학교와 남성여자고등학교로 분리됩니다. 1945년 미군정으로부터 동아대학교 설립인가를 받아 이사장을 맡았으며, 1945년부터 1960년까지 부산기독교연합회 회장을 맡았습니다. 남한 농지개혁때 대규모의 땅을 불하받아 남성, 대동 학교법인을 설립하여 1967년까지 이사장을 맡았습니다. 1949년 반민특위로 체포되었다가 기소유예로 풀려난 후 4년제 대학인 경남 사범대숙을 설립하고 초대 학장을 맡습니다. 1961년부터 1962년까지 한국기독교연합회 회장을 역임하고 1968년까지 부산신학교를 설립하고 교장과 이사장을 활동하다 1977년 12월11일 사망하기까지 부산교육계에 내선 일체를 충실히 실천했던 종교인입니다.

    불교계에서는 부산 범어사 주지였던 차상명 스님도 신도들이 시주한 돈을 몽땅 전쟁비용으로 헌납해 전국에서 두 번째로 많은 돈을 헌납한 기록을 남깁니다. 김길창 목사는 종교인들을 인솔하여 일본을 성지순례하고 “내선일체논리”를 매일신문에 사설, 논설로 게재하여 전쟁터에 나가라고 독려했습니다.


    참가자들은 내처 흑교4거리를 지나 경남고등학교 교정에 있는 안용백 흉상 앞까지 갔습니다. 그는 친일지식인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갖춘 인물로 마이니찌 신문에 논설과 사설의 단골 필자로 나서 내선일체와 창시개명 주창했습니다. 일제강점기의 미래를 예찬하고 내선일체 이념을 알리고 선전하는 대표적인 논객으로 활동하다 1945년 경남중고 초대 교장으로 등극합니다. 해방 후 문교부 고등교육국장과 문교부 편수국장을 역임하며 해방된 조국의 교과서를 만들고 1958년 전라남도 보성에서 자유당 소속으로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에 당선했으며 이듬해 국회 문교위원회 위원장을 맡기도 했습니다. 이후 전라남도 교육감을 지내고 1977년 5월 11일 사망했습니다.

    참가자들은 친일파가 되는 것이 나라를 살리는 길이라고 외쳤던 안용백의 흉상이 그의 제자였던 제일동포 강주홍 동문(7회)의 5억 기부로 2009년 교정에 세워져 있는 현장에서 한국교육의 현재와 미래를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는 일제강점기 식민지교육의 실무자였습니다.

     

    산을 돌아 민주공원길 광복회관으로 올라가 전시실을 둘러보고 독립투사들의 영정 앞에서 모두 숙연하게 묵념합니다. 분단 70년이 되는 올해 일본은 집단자위권행사를 위한 안보법을 개정하고 전쟁할 수 있는 국가가 되었습니다. 일본의 한반도 재침략 가능성이 대두되고 한반도 사드배치를 통해 한미일 군사동맹이 구축되면 일본 군국주의화에 날개를 달아 주게 됩니다.

    가쓰라 태프트 밀약이 체결된 일제강점기 직전처럼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한반도는 군사적 긴장이 점증하고 있습니다. 부산의 친일 매국인사들을 꾸짖으며 참가자들은 각오를 새롭게 하면서 모든 일정을 마쳤습니다.



    사진과 함께 부산 까페에서 다시 보기 : http://cafe.daum.net/bsspark/k2ar/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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